꽃도 초원도 몸을 낮추는 곳, 선자령 야생화 산행
꽃도 초원도 몸을 낮추는 곳, 선자령 야생화 산행
사방이 야생화 천국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눈 산행지로 손꼽히는 선자령의 여름은 짙푸른 숲과 능선에 피어난 야생화로 생각지 못한 즐거움을 안긴다. 대관령과 곤신봉 사이에 있는 선자령은 해발 1,157m이다.
산행은 대관령에서 시작한다. 대관령은 남쪽으로 능경봉, 북쪽으로 선자령 산행의 기점이다. 대관령에서 선자령 가는 길은 소의 등처럼 부드러운 능선 덕에 초심자도 어렵지 않다.
옛이야기는 고개를 따라 넘나들고
대관령의 옛 이름은 ‘대굴령’이었다. 고개가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겨우 한두 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오솔길을 조선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인 고형산(高荊山)이 우마차가 다닐 수 있게 넓혔다. 백성을 위해 넓히고 닦은 길이 병자호란 때에는 공교롭게도 한양으로 진군하는 적군의 이동로가 되었다. 살아서 좋은 일 했던 고형산은 죽어서 부관참시를 면하지 못했다. 훗날 대관령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무고가 밝혀지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으나, 역사의 평가란 게 부질없기도 하다.
선자령 들머리는 대관령 휴게소에서 강릉 방향으로 400m 정도 올라간다. 등산로는 입구에서 양떼목장을 거쳐 7부 능선을 따라가는 코스와 국사성황사나 KT 송신소 방향으로 올라가 백두대간 마루금을 걷는 코스가 있다.
국사성황사와 산신각이 있는 숲으로 들어오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예부터 이곳은 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여겨졌다. 남한에서 가장 기가 센 곳 중 하나라고도 한다. 성황사와 산신각 앞에는 갖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대관령 국사성황사는 신라 선승 범일 국사를 서낭신으로, 김유신을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실존 인물이었던 이들은 죽어서 영동지방을 수호하는 서낭신과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음력 4월 15일이면 국사성황제와 산신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고갯길 따라 걷다 보면 귀한 야생화를 만나고
국사성황사에서 돌계단을 올라가면 백두대간 마루금을 만난다. 숲길을 지나 숨이 조금 가빠질 무렵 하늘이 터지면서 새봉 전망대가 나타난다. 대관령과 선자령의 딱 중간지점에 있는 새봉 전망대에 올라서면 동해와 강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쪽빛 동해와 수평선은 눈을 시원하게 하고, 능선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더운 몸을 식힌다.
새봉 전망대를 지나면 다시 숲으로 들어선다. 우거진 활엽수 숲 그늘 한쪽, 햇살이 들어오는 작은 자리에 앙증맞은 야생화가 피었다. 애기앉은부채다. 몇 년 전 이 길에서 우연히 알게 된 꽃인데 처음에는 이름을 잘못 알아 애기앉은부처라고 불렀다. 아닌 게 아니라 꽃 모양이 영락없이 앉은 부처 모습이다. 부처의 광배를 닮아 불염포(佛焰苞)라 불리는 짙은 자주색 꽃 덮개 안에 작은 꽃차례가 가부좌를 틀고 있다. 애기앉은부채 꽃을 보려면 나 자신을 낮추듯 바짝 엎드려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남한에서는 대관령 이북 고산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꽃이다.
선자령을 걷다 보면 제비동자꽃도 만날 수 있다. 동자꽃의 한 종류지만 날아가는 제비 꽁지처럼 화려하고 날렵하게 생겼다. 애기앉은부채와 같이 대관령 이북 지역에서만 자란다. 제비동자꽃은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된 보호종이다. 하산길 계곡 옆 습지에 제비동자꽃 보호구역이 따로 있지만, 산행길에서도 종종 만날 수 있다.
알아보기만 한다면, 귀한 야생화 보는 기쁨이 커진다. 해맑은 동자승 얼굴을 닮았다는 동자꽃, 오리들이 모여 앉아있는 모양의 진범, 병사 투구처럼 생긴 투구꽃, 수줍게 혀를 쏙 내민 잔대, 물봉선화, 마타리, 구절초, 개미취 등 셀 수 없이 많은 야생화가 선자령을 천상의 화원으로 수놓고 있다. 봄에서 여름 지나 가을까지 선자령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숲길의 반전, 아늑한 구릉 사이 펼쳐지는 넓은 초원
숲을 벗어나면 곧 광활한 초지가 펼쳐진다. 50기가 넘는 풍력발전기가 줄지어 선 풍경이 자못 이국적이다. 아늑한 구릉 사이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초록이 일렁이는 목장길을 따라 더 걸으면 무던한 언덕 위에 세워진 정상석을 만난다. 숨 몰아치듯 달려온 백두대간이 이곳에서 살짝 속도를 늦추는 모양새다. 선자령 정상에서는 백두대간 능선과 함께 발왕산과 용평리조트, 오대산, 태기산 등 강원도의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푸른 동해는 선자령이 주는 덤이다.
대관령으로 돌아오는 하산길은 초반 임도를 따라 걷다가 숲길로 들어선다. 시원하게 뻗은 구상나무, 낙엽송, 자작나무 사이로 계곡 물소리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양떼목장 울타리를 지나 휴게소에 도착한다. 되도록 느리게 걷자. 걸음이 빠르면 땅에 납작 붙어 피어난 애기앉은부채를 지나치기 십상이다. 꽃과 초원이 능선을 따라 몸을 낮춰 뻗어있는 선자령은 느리게 걷는 고갯길이다.
[산행 길잡이]
선자령은 야생화 산행, 눈 산행, 일출·일몰 산행, 백패킹 등 어떠한 목적으로 가도 괜찮은 산이다. 대관령에서 출발하는 원점회귀는 3가지 코스가 있으며, 백두대간 능선으로 올라가 7부 능선 숲길로 하산하는 코스를 추천한다. 산행 거리는 총 12km로 4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야생화를 찍다 보면 한 시간 정도 더 잡아야 한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나들목에서 나와 456번 지방도를 타고 가면 대관령 휴게소에 도착한다. 양떼목장 입구와 국사성황사에도 주차가 가능하다. 시간이 된다면 휴게소 바로 뒤쪽 양떼목장도 둘러보면 좋다.
교통
횡계 버스터미널(☎033-335-5289)에서 대관령마을휴게소까지 하루 4회 농어촌 버스가 운행한다. 첫차는 09시이며 10:10, 11:15, 14:00에 출발한다. 택시를 이용하면 10분 정도 소요되며 요금은 9,000원 선이다. 횡계로 돌아갈 걸 대비해 기사님 연락처를 받아두는 게 좋다. 동서울터미널에서 횡계까지 하루 9회, 남부터미널에서는 하루 3회 시외버스가 운행한다. (코로나 19로 감편 운행 확인 요망) 강릉시외버스터미널에서 횡계까지는 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식사
오삼불고기와 황태구이는 횡계 어느 음식점에 가더라도 빠지지 않는 메뉴다. 납작식당(☎033-332-6587)은 오삼불고기 원조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40년 전통을 자랑한다. 다른 식당과는 달리 직화로 구워내 더욱 풍미가 있다. 동양식당(☎033-335-5439)은 허영만의 백반 기행에도 나온 집으로 다른 집보다 매콤하고 양이 많다. 개성집(☎033-335-1222)은 명태조림과 명태갈비조림이 맛있는 집이다. 4인 가족이 실속있게 먹을 수 있다.